극동칼럼(five-two):경건과 영성, 그리고 문화(2)

25시의 영성

오늘 아침에는 저의 얼마간 영국생활을 통해서 얻은 영성문제에 대해서 약간은 비판적인 견해를 갖게 된 계기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영국인을 만났습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알고는 자신을 크리스챤이라고 소개하더군요. 반가와서 계속 얘기를 나누는 중, 교회는 전혀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 교회 다니는 것은 spiritual한 것이고 자기는 단지 spiritual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spiritual한 것이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그 사람은 동양에서 온 저를 무척 반겨 주었습니다. 이것저것 동양문화, 한국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질문하면서 신비한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관심을 그는 spiritual한 것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속 깊은 곳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영국을 찾았던 저에게 있어서는 그런 그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서양사람들은, 삭막한 기계문명과 딱딱한 콘크리트문명 속에서 개미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삶과 톱니바퀴 속의 조그만 나사못과 같은 자신들의 삶의 거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자신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까? 기계물질 대신에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았습니다. 물질과는 다른 그 무엇이어야 자신들의 갈증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도의 컴퓨터문화와 최첨단의 과학적 기기들을 즐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영혼의 갈증을 채워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런 갈증의 충족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소위 '영성'이었던 셈입니다. 최첨단의 비행기나 초고층빌딩을 세우는 기공식에서 돼지머리와 음식들을 마련해서 고사를 지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우환이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고도로 합리화되어버린 제도화된 고등종교의 의식보다는, 오히려 이해되지 않으면서 불합리한 것이 오히려 더욱 마음에 호소력이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25시에 살게 되었습니다. 잠수함에는 오랫도록 잠수하기 위해서 공기가 필요한데, 환기를 위해서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하는 특수장치가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그런 장치가 없어서 대신 흰토끼를 싣고 다녔다고 합니다. 공기가 탁해서 토끼가 죽어버리면 사람의 생명도 그 뒤 five~six시간 밖에 지탱할 수 없어서 함장이 최후의 결심을 내려야 합니다. 바로 최후의 순간이 박두한 시간, 그것이 25시의 시간입니다. 토끼가 삼일교회 죽어버린 24시는 지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절망적인 순간, 이것을 비유해서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는 '25시'라는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기계화되어서 주인공이 일종의 기계적 기술노예에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제 구제할 수 없는 그 시간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고 서구의 현대문명을 파악한 셈입니다. 제도화된 교회생활보다는 무언가 신비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그것이 맹목적인 도약이라고 여겨질 지는 몰라도, 하여튼 도약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라도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절망감, 이런 것들이 '영성'을 추구하게 한 것입니다. '영성'이란 것이 별의별 요란하고 이상한 것들과 관련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25시의 영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 이성과는 관계없이, 이성이란 것에는 아예 진저리를 내고 마는 그런 영성, 어쩌면 자살적 영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영성이기도 합니다.



이런 영성에 어떻게 하면 새로운 공기를 들이 마시게 할 수 있을까요? 영성의 원천, 그 뿌리로 돌아가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디에서 단추가 잘못 끼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작업, 영성의 기원과 그 역사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한 셈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 신 앞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그 영성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대체 영성이란게 있다면, 그 삼일교회 영성을 영성되게 하는 것은 바로 영이 되시는 하나님으로서입니다. 나의 영과 하나님의 영과의 만남, 그것이야말로 참된 영성의 시작인 셈입니다. 그 영성을 회복하시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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